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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생존 게임이 된 한국 정치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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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민종 댓글 0건 조회 0회 작성일 25-05-3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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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 아홉 번째 대통령 선거가 목전에 다가왔다. 12·3 계엄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 질서의 중대한 위기를 거친 한국 민주주의는 다시금 갈림길에 서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번 선거가 한국 민주주의의 향방을 좌우할 변곡점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이번 대선 국면에서도 나타난 두 가지 상반되는 현상-정치의 과잉과 정치의 부재-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선명히 드러낸다.
한국에서 정치의 과잉은 곧 정치의 극단적 생존 게임화로 나타난다. ‘서바이벌 게임이 되어버린 정치’는 수사가 아니라 현실이다.
민주화 이후 여덟 번의 대통령 선거와 네 차례의 정권교체를 거쳤지만, 여전히 선거의 패자는 ‘정치적 경쟁자’가 아닌 ‘적(敵)’으로 간주되고 있다. 정치는 정체성을 둘러싼 나눌 수 없는 이슈(indivisible issue)를 두고 벌이는 경쟁이 된다. 그 결과 대선은 정치권력을 결정하는 민주적 절차가 아니라 진영의 존폐를 건, 나아가 나라의 존망을 건 건곤일척의 전면전이 된다.
진영 간 대립이 극심했던 제20대 대선은 그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는 새로운 극단적 갈등의 시작이었다. 0.74%포인트(약 24만표)라는 역대 최소 득표율 차로 패배한 야당 후보는 정권을 잡은 세력에 의해 전방위적 수사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음모론을 신봉하는 시민이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야당 지도자에게 생명을 위협하는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이처럼 혐오와 배제의 정치가 중심이 된 상황에서, 선거는 더는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가 아니라 권력을 독점해 상대를 제거하는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란 본래 충돌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갈등과 집단적 열정을 선거라는 민주적 정치 과정을 통해 제도적으로 조정하는 체제다.
그래서 선거는 ‘돌 대신 종이로 싸우는’ 방식이며, ‘종이 돌(Paper Stones)’이라는 상징적 이름을 얻었다. 선거가 이 기능을 하려면 패자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는 선거 제도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정치가 넘쳐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직면한 것은 바로 정치의 부재다. 정치의 공론장은 정체성의 정치에 기대어 상대 진영을 극단화하는 언술이 지배한다. 생존 게임에 몰입한 정치가 공적 의제 형성과 미래 비전 제시를 방해한다. 그 결과 한국 사회가 당면한 구조적 위기-심화하는 다중 격차, 청년의 기회 사다리 붕괴, 수도권 일극 체제와 지역 소멸-에 대한 쟁점은 대선 공론장에서 온전히 다루어지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교육 불평등이다. 교육은 한때 ‘계층 상승의 위대한 균형자(The Great Equalizer)’였으나, 이제는 ‘거대한 구분자(The Great Divider)’가 되었다. 상위권 대학 진학률 격차의 75%는 ‘부모의 경제력’에서 비롯됐다는 최근 연구 결과(정종우 외, 2024)를 포함해 많은 실증적 연구가 이를 입증한다. 이런 현실에서 시험 중심의 ‘K능력주의’는 승자에겐 오만을, 패자에겐 절망을 안기며 사회통합을 해친다. 실제로 지방대와 지역 출신을 차별하는 혐오 표현은 이제 일상에 가까이 와 있다.
교육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재생산 통로가 된 이 시대 청년의 기회 사다리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중대한 대선에서 각 당 후보들의 슬로건은 시대정신에 대한 실질적 응답을 담지 못하고 있다. “이제부터 진짜 대한민국”(이재명), “새롭게 대한민국! 정정당당 김문수”(김문수), “미래를 여는 선택, 새로운 대통령 이준석”(이준석), “갈아엎자 불평등 세상”(권영국) 등은 모두 추상적인 수사에 그치고 있다. 각 정당이 선관위에 제출한 10대 공약조차 이 구조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룰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4·19 직후 한 시인이 탄식했던 것처럼 방만 바꾸지 않기 위해서, 2016~2017년 촛불항쟁 시기 광화문에서 한 시인이 일갈했던 것처럼 대통령 하나만을 바꾸지 않기 위해서, 임박한 대선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은 슬로건이나 이미지 너머에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 후보가 한국 사회가 직면한 복합적 위기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 속에서 어떤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있는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어떤 구체적이고 실행할 수 있는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지에 대한 진지하고 꼼꼼한 검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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